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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경주를 만나다

❷교촌 최부잣집 사랑채?
은윤수 기자 / newseun@hanmail.net입력 : 2019년 08월 26일
↑↑ ▲글쓴이 조철제 선생.
ⓒ 동해안시대
당시 일본 사람들은 골동품을 좋아했다. 특히 경주의 신라 토기나 금 귀고리, 부장품을 수집하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이대로 방치하면 신라 유물이 남을게 없을 듯하여 문파도 유물을 사 모으기 시작했다.

1913년 여름 경주 유지들과 뜻을 모아 경주박물관의 전신인 경주고적보존회를 창립하고 문파가 회장에 취임했다. 1926년 10월 스웨던의 황태자 구스타프가 경주를 방문하여 서봉총을 발굴하는 데 동참했다. 그때 그가 최 부잣집 사랑채에 머물렀던 것도 문파의 신라 유물 보존과 인연이 닿았기 때문이다.

1918년 봄 인촌(人村) 김성수(金性洙)가 처음으로 교촌을 찾은 이래 거의 1년에 한번씩 들렀다. 자기 사업에 지방의 유력 인사를 찬여토록 권유하기 위해서였다.

문파는 김성수의 걸출한 인품과 능력에 감복했다. 그리하여 문파는 동아일보와 경성방직 창립 발기에 동참하게 되었다. 1933년 3월에 보성전문학교(지금의 고려대학교) 도서관 낙성식 때, 문파는 김성수의 초청을 받고 참석하여 상당 기금을 기부했다. 문파가 뒷날 교육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된 동기는 김성수, 안희제와의 만남에서 비롯되었다.

1930년 초 위당(爲堂) 정인보(鄭寅普)와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이 최부잣집에 1년 반 가량 머물렀다. 이들이 여기에 온 이유는 『동경통지(東京通志)』를 편찬하기 위해서였다. 문파는 고려 이후 경주 지방사가 너무 소략하고, 특히 1669년(현종 10)에 편찬된 『동경잡기』가 있지만 누락된 부분과 오기가 많음을 아쉬워했다. 마침내 문파는 모든 경비를 혼자 부담하고 향중 인사와 상의한 후에 주지(州誌)를 다시 편찬하기로 했다.

이때 이능격(李能格) 등 경주 문사 23명이 도청(都廳)과 교정 등을 분담했지만, 전채의 총괄 주ㅠ제는 정인보와 최남선이 맡았다. 특히 이들 두 사람은 최 부잣집 사랑채와 도청이 개설된 향교를 오가며 관련 자료를 선별하여 책을 편찬했다.

1933년 목판본 14권 7책으로 간행된 『동경통지(東京通志)』는 이떼까지 나온 경주 지방지 가운데 가장 방대하게 집대성된 책이다. 서문은 정인보와 최남선이 각각 썼으며, 박화준(朴華準)이 이들을 많이 보좌했다. 정인보는 『동경통지』가 간행된 이후에도 자주 최 부잣집 사랑채에 들렀으며 1937년 문파, 정인보, 박화준이 석굴암을 관람하고 찍은 사진이 전한다.

믄파는 1947년 3월 민립 대구대학을 설립했지만, 광복 이후 일관성 없는 문교정책으로 대학은 곤경에 처했다. 1954년에 문파는 전 재산을 출연하여 문파교육재단을 창설했는데, 그는 다시 김범부(金凡父)의 의견을 받아들여 경주에 계림학숙을 세웠다.

대구대학을 설립하고 남은 전 재산을 모아 재단을 만들었으며 이를 모체로 삼아 게림학숙울 경영했다. 그러나 휴전 이후에 학생 모집이 여의치 않았고, 교수들마저 서울로 떠나 버려 할 수 없이 1957년 휴교를 단행했다. 그리고 그의 전 재산을 바쳐 설립한 문파교육재단은 대구대학에 기부, 통합되었다.

한편 대구에 또 다른 청구대학이 있었다. 1960년대 초에 이르러 청구대학은 재정난으로 정권 실세에 넝어갔다. 당시 문파는 재산이 모두 임야나 전답 등이어서 수입이 많지 않았다. 대구대학 운영이 어려움에 봉착하자, 그는 삼성그룹 이병철(李秉喆) 회장에게 대학 인수를 요청했다.
↑↑ ▲경주 최부잣집 사랑채 복원 전 모습.
ⓒ 동해안시대
당시 이병철은 판매 자본가라는 좋지 않은 이미지를 쇄신하기 위해 교육 사업에 관심을 가지며 이를 수락했다. 이병철은 차남 이창희를 데리고 최 부잣집 사랑채를 방문했다. 문파는 이병철 보다 26세 위였다. 이병철은 문파 앞에서 시종 꿇어앉아 대화를 나눴다. 문파는 아무런 조건 없이 대구대학을 이병철에게 넘기며 한국의 명문사학으로 발전시켜줄 것을 당부했다.

그리고 선대로부터 가보로 내려오는 15kg이나 되는 귀중한 단계연(端溪硯)을 선물했다. 이병철은 학교를 인수한 후에 진입로 확장하며 학교에 애착을 가지는 듯했다. 그러나 1967년 '사카린(甘料) 밀수사건'이 터지자, 이병철은 일본으로 도피하고, 차남은 구속되었다. ㅇ병철에 대한 비난이 높아지자, 그는 학교 경영에 소극적이었고, 다시 대구대학은 어려움에 봉착했다.

이때 대구대학은 당연히 설립자 문파에게 돌려줘야 했었다. 그러나 문파도 1970년 타계하였고, 당시 정권 실세들이 개입하여 마침내 1976년 12월 이사회를 열어 청구대학과 통합시켜 버렸다. 두 학교 이사회의 결의에 따라 통합한 후에 교명을 영남대학교라고 개칭했다. 문파에게는 아무런 양해나 통보도 없었다.

문파는 이병철에게 학교 경영을 부탁했을 뿐 이들에게 넘기지는 않았다. 이후 문파는 이병철을 만날 수 없었고, 1969년에 이르러 문파는 이사진 명단에서 빠졌다. 대구대학의 문파교육재단에는 문파의 본가를 비롯해서 전 재산이 기부되어 있었다. 12대 만석의 부(富)가 이렇게 종언을 고하고 말았다. 사물이 순조롭게 내게로 오면 막지 말고 , 이미 간 것은 쫓지 말라는 격언을 어떻게 되새겨야 하는지 화두다.

1970년 10월 문파가 타계한 얼마 후, 화재가 발생하여 최 부잣집 사랑채가 전소되었다. 사람도 재물도 함께 간 듯 빈터만 남았던 것을 지난 2006년 11월에 복원한 것이 지금의 사랑채다. 사랑채 건물에 오르면, 아직 새 목재의 향이 난다. 사람이 머물다 간 체취는 찾아볼 수 없다. 과객들이 남긴 수많은 일화와 문적(文蹟) 등은 어디로 가고 없는가? 그렇지만 이곳에 수많은 국내외 명사들이 들러 묵으면서 앙관부찰(仰觀俯察)했다고 생각하면, 어찌 또 다른 흥감과 회포가 없을 수 있겠는가?
은윤수 기자 / newseun@hanmail.net입력 : 2019년 08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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