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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조철재 선생의 또 다른 경주를 만나다

"교촌 최부잣집 사랑채"
은윤수 기자 / newseun@hanmail.net입력 : 2019년 07월 14일
↑↑ ▲한학자 조철재 선생
ⓒ 동해안시대
경주출신 한학자 조철제 선생은 천년고도 경주의 곳곳에 드러나 있는 신라 유산들의 뒤에 숨어 있는 '또 다른 경주'로 고대사에서의 서라벌이 아닌 근세사에서 이뤄진 경주의 또 다른 모습을 소개하고 있다. 조철제 선생의 글과 오세윤 문화재 사진 전문작가의 사진으로 연재를 시작한다. /편집자 주

경주 교촌 최 부자가 연간 수확한 미곡은 4∼6천 석 정도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1831년(순조 31) 용암(龍庵) 최기영(崔祈永, 1768∼1834)이 내남에서 이곳 교촌으로 이사할 때 최고의 부를 누렸으며 재산은 거의 만석이었다. 연간 수확되는 미곡 중에 1천 석 정도는 과객들의 식량으로 사용되었다고 전한다. 교촌 최 부잣집에 손님이 많으면 하루 100명 정도 드나들었다. 백미 1천 석으로 밥을 지어 대접한다고 했을 때 부식 값도 만만치 않았다. 반찬은 주로 값비싼 과메기를 포함하여 고기반찬과 미역국이 나왔다.

그런데 조선시대에는 과객의 신분에 따라 밥상이 달랐다. 양반은 1인1상이지만 평민은 겸상으로 대접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런데 최 부잣집에는 겸상이 없다. 수백 명이 한꺼번에 와도 밥상은 반드시 1인1상으로 나갔다. 이렇게 대접하려면 집안에 많은 사람이 필요했고 온 이웃이 북적거렸다. 양반집의 일상예는 봉제사 접빈객(奉祭祀 接賓客)이라 하지만 쉽지 않은 일이고 특히 손님 대접은 잘 하기 힘들다.

과객은 하루 만에 떠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몇달 혹은 몇 년씩 머문 이도 있었다. 보통 객이 떠나면 그대로 보내지 않고 하루 정도 먹을 수 있는 쌀을ㅇ 챙겨 주었다. 뿐만 아니라 특별한 손님이 오면 떠날 때 반드시 얼마의 노잣돈을 주었다. 또한 조선 중기 이후 경주 부윤 가운데 최 부잣집을 내방하지 않은 사람은 드물었을 것이다. 부윤은 그 지역 명망 있는 인사와 교류하고 문지(門地)가 높은 가문에 출입하여 주민의 정서와 풍속을 살폈다.
↑↑ ▲경주 교리 항공전경./동해안시대DB
ⓒ 동해안시대
전진문의 『경주 최 부잣집 300년 부(富)의 비밀, 2004』와 최해진 교수의 『경주 최 부자 500년의 신화, 2006』에 실린 글을 보면, 최 부잣집 사랑채에는 근세 인물 가운데 최익현, 신돌석, 손병희, 박상진, 여운영, 장덕수, 송진우, 조병옥, 무쵸 미국대사 등 많이 다녀갔다.

다음은 12대 만석의 마지막 부자 문파(汶坡) 최준(崔浚, 1884∼1970)과 얽힌 몇몇 명사들을 살펴본다. 먼저 의친왕(義親王)이다. 의친왕은 고종의 셋째 아들이며 귀인 장씨의 소생이고 순종의 이복 동생이다. 일제강점기 초에 의친왕은 최 부잣집에 와서 잠시 머물렀다. 경남 의령군 부림면에 사는 백산(白山) 안희제(安熙濟)는 거부이며 독립운동에 헌신한 인물이었다. 어느 날 백산이 재산가들과 함께 승합차 예닐곱 대를 몰고 교촌에 나타났다. 당시 경주에서 시발택시 1대가 있었을 뿐이었다.

민초들은 차를 구경하려고 교촌으로 몰려들었다. 백산의 이 같은 의도는 자신도 부자라는 것을 과시하고 아울러 문파에게 믿음을 보여주고 싶어서였을 것이다. 마침내 문파는 백산과 의기투합하여 그가 1914년에 설립한 백산상회에 거금을 투자했다. 겉으로는 해산물과 육산물 등을 판매하는 회사였지만 실제로는 중국 상해에서 활동하는 독립지사들에게 군자금을 송달하는 회사였다. 문파는 백산상회를 통해 임시정부에 100여만 원을 보냈다. 엄청난 금액이었다. 그러나 이것이 빌미가 되어 문파는 공주 헌병대에 끌려가서 혹독한 고문을 당하고 평양감옥에서 옥살이를 했다. 그 사이 보증 때문에 가산은 크게 기울어 거의 부지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문파는 아주 곤경에 처해 있었다.

이때 의친왕은 나라 잃은 왕손으로서 유람 차 경주에 들렀다. 6일 동안 최 부잣집 사랑채에 머문 그는 문파가 비범한 인물임을 알았고 또한 독립운동 자금조달로 전 재산이 채권은행에 차압될 지경에 처했음을 감지했다. 의친왕이 떠날 때, 문파는 청탁 한마디 하지 않았다. 그러나 상경한 의친왕은 식산은행 두취(頭取, 은행장인 아리가 미쯔도요)에게 간곡히 부탁하여 그를 도와주도록 했다. 아리가는 문파의 부채 80만원 중 40만원을 탕감하고 나머지 40만원은 천천히 상환하도록 했다. 아리가의 이 같은 특별 조치는 문파로 하여금 친일적 조건을 은연중에 내걸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후 아리가는 여러 번 교촌 최 부잣집을 방문했다. 그때마다 문파의 집에 신라 유물을 전시할 수 있는 박물관을 사용하도록 해 줄 것, 문파가 총독부 학무국장(지금의 교육부 장관)을 맡아줄 것, 제6대 중추원 참의로 모시겠다는 것 등의 부탁을 했을 것이다. 문파의 아우 최윤이 중추원 참의가 된 것도 이러한 것 때문이었다. 문파는 특유한 고집과 미적거림 그리고 광복을 맞음으로써 그들에게서 벗어날 수 있었다. 어쨌던 이 같은 일로 아리가의 셋째 아들 아리가 도시히꼬와 문파의 맏손자 최염이 서신을 교환하며 다시 만난 기연(奇緣)이 있다. 이러한 정의(情誼)는 의친왕의 사람 볼 줄 아는 혜안에서 비롯되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문파(汶坡)'라는 최준의 호는 의친왕이 지어준 것이다.
↑↑ ▲교리 경주 최 부잣집의 복원된 사랑채./동해안시대DB
ⓒ 동해안시대
다음은 순정효황후 윤씨의 내방이다. 1904년 순종이 황태자로 있을 때 첫째 황태자비 순명효황후가 사망하자 1906년 그가 황태자비로 책봉되었으며 이듬해 순종이 황제에 오르자 황후가 되었다. 일제강점기에 순정효황후가 경주에 들렀다. 먼저 경주군청에 들렀다가 지금의 경주문화원인 조선총독부 박물관 경주분관을 찾았다. 왕관 등 찬란했던 신라 유물을 관람하고 뜰에서 기념촬영까지 했는데 그 사진은 아직 남아 있다. 그런데 문제는 황후의 숙소였다. 당시 여성들이 투숙할데가 마땅하지 않았다. 경주의 최고급 여관은 지금 월성초등학교 바로 동편에 있었던 안동여관(安東旅館)이다. 백안동(白安東)이란 기생 출신 여성이 세운 여관으로 많은 명사가 이용했다.

그렇지만 황후가 여관에 투숙할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선택한 곳이 교촌 최 부잣집이었다. 황후가 교촌에 도착하자, 최 부잣집 안채와 사랑채는 수 많은 사람이 몰렸다. 저녁이 되자, 황후를 위해 조촐한 연회가 베풀어졌다. 문사들은 시를 짓고 악사들은 피리와 거문고를 연주하며 흥이 오르는 듯 했다.

그런데 조금 시간이 흐르자, 집안 안팎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였고 급기야 온 집안이 망국의 한으로 눈물바다가 되었다. 황후도 최 부자도 내방객도 모두 울었다. 이를 눈치 챈 왜경은 그만 거문고 줄을 끊으며 연회를 강제 해산시켰다. 저들은 황후가 경주를 떠날 때까지 두문불출하게 하고 외부인의 출입을 막았다. 그때 연주했던 거문고는 영천 어느 유지가 가져갔다는 설이 전하고 있다. 이로 인하여 최 부잣집은 더욱 인구에 회자되었다.
은윤수 기자 / newseun@hanmail.net입력 : 2019년 07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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