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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노계 박인로의 흔적을 찾아


동해안시대 기자 / newseun@hanmail.net입력 : 2019년 03월 19일
↑↑ ▲영남실학풍수연구소장 박성대(지리학 박사)
ⓒ 동해안시대

노계 박인로(蘆溪 朴仁老, 1561~1642)는 송강 정철, 고산 윤선도와 더불어 조선 3대 시가인으로 불리는 인물로서, 『누항사(陋巷詞)』 , 『선상탄(船上歎)』, 『노계가(蘆溪歌)』 등을 비롯한 시조(時調) 70여 수와 가사 11편을 남겼다. 그런데 조선 시대 대표적 문인 가객(歌客)의 한 사람이었던 그가 경주와 인연이 깊었던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그의 82세의 생애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전반생(前半生)은 임진왜란에 종군한 무인으로서의 면모가 두드러졌다. 그러나 후반생(後半生)은 독서와 시작(詩作)에 전념한 문인 가객(歌客)으로서의 면모를 보였다. 그 중 말년인 76세 때 지은 『노계가(蘆溪歌)』의 공간적 배경이 경주시 산내면 대현리 동창천 일대이다. 그의 호 노계 또한 이곳에서 유래했다. 

박인로의 본래 세거지(世居地)는 영천시 북안면 도천리다. 그런데 우리가 어릴 적 마을 간의 텃세를 생각해보면, 그가 도천리에서 보행길로 약 32km씩이나 떨어진 대현리 일대에 터를 잡게 된 배경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굳이 짐작한다면 이곳이 1480년대부터 밀양(密陽) 박씨가 터 잡고 살고 있던 마을이라는 것이다. 박인로는 그의 본관 또한 밀양이기에, 공간적 텃세에 대한 걱정을 좀 덜 수 있겠다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박인로의 노계 거주는 두 차례였다. 제1차는 1619년(59세)경부터 1628년(68세)까지이고, 제2차는 1636년(76세) 봄부터 얼마간이었다.

■ 제1차 노계 거주기(1619년경~1628년경)

박인로가 처음 노계에서 거주한 곳은 산내면 대현1리 횟골마을의 동창천 건너편 산골짜기 속이다. ‘국민청소년수련마을’ 입구에 들어서 주차장 왼쪽을 보면, 영천시의 ‘영천향토사연구회’에서 1996년에 세운 ‘노계 박인로 유적지’ 비석이 보인다(그림 1). 그러나 주변 지형지물에 가려 누군가에게 그 위치를 묻지 않는다면 찾는 것이 쉽지 않다.

↑↑ ▲국민청소년수련마을 주차장에 있는 노계 박인로 유적지 비석.
ⓒ 동해안시대
동쪽으로 약 400m 정도 들어가면 하천변으로 누런 갈대숲이 우거져 있어 이곳이 왜 노계(蘆溪), 노곡(蘆谷)으로 불렸는지 이해된다. 그리고 펜션형으로 조성된 마을(약선마을)이 있고 그 너머로 두 개의 절벽바위가 서로 대치하고 있는 듯하다.

이 골짜기 안이 박인로가 유거(幽居, 속세를 떠나 외딴 곳에서 삶)한 곳이라 전해진다(그림 2). 관련 연구에 의하면 박인로는 골짜기 안 산중턱(노란색 점선)에서 거처하면서 골짜기 밖의 황무지를 개간하며 살았다고 한다. 

↑↑ ▲약선마을 뒤로 보이는 노계가 유거했던 골짜기.
ⓒ 동해안시대
그런데 박인로가 실제로 거주했던 위치가 상식적으로 집을 짓고 살기에는 너무 가파른 산능선 위다. 실제로 올라가보면 집터로 할 만한 자리가 없으며 묘지 흔적조차 없다. 통상 산의 능선에는 묘지 한 두 개쯤은 있기 마련인데 이곳은 경사가 급해 묘지 또한 없다. 이런 곳에 박인로가 집을 짓고 살았다는 것에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박인로가 실제 생활했던 집터의 위치에 대해서는 추가 조사가 필요하다. 박인로는 이곳에서 유거하면서 황무지를 일구어 밭 수백 무를 경작하다가, 남에게 그의 밭을 침경당해서 밭과 집을 다 넘겨준 뒤에 향리인 영천의 도천리로 귀환하게 된다.

■ 제2차 노계 거주기(1636년~1637)

1628년에 경작지를 침탈당해 밭과 집을 다 넘겨준 뒤에 노계를 떠났던 박인로는 7~8년 뒤인 1636년 봄에 다시 노계를 찾아 새로운 곳에다 집을 짓고 살게 된다. 그리고 이듬해 5월 처상(妻喪)으로 다시 영천 도천리로 귀환한 것으로 추정된다. 두 번째로 터를 잡은 곳은 처음 살았던 곳에서 남쪽으로 냇가 길로 약 3.3km 떨어진 ‘대현동구(大賢洞口)’ 일대였다.

대현1리 서편마을에서 동쪽길로 접어들어 시다마을로 향해 차로 약 2~3분 가면 물길이 완전히 휘돌아 감아 도는 곳을 만나게 된다. 그는 이곳에서 집(蝸室)과 정자(草草亭)를 짓고 지냈는데, 집터로 추정되는 곳이 그림 3의 ⓐ지역이며, 정자터로 추정되는 곳이 ⓑ지역이다.

↑↑ ▲노계의 2차 유거지인 대현 동구 일대.
ⓒ 동해안시대
박인로는 이곳의 자연적 아름다움을 『노계가』로 남겼다. 특히 횟골마을 골짜기에 유거하며 지었던 『노주유거(蘆洲幽居)』에는 없었던 풍수적 표현들이 많이 발견된다. 먼저 집터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현무주작과 좌우용호도 마치 그림을 그린 듯이 갖추고 있으며 산맥이 맺힌 아래 장풍향양(藏風向陽)한 데 푸른 담쟁이덩굴을 걷어 내고 서까래 작은 집(蝸室)을 배산임류(背山臨流)하여 다섯 버들 늘어진 물가에 지었으며...."

풍수에서 현무와 주작, 청룡과 백호를 사신사라 부른다. 이곳은 산줄기와 물줄기가 서로 감아 도는 지형으로 사신사를 잘 갖추고 있다. 특히 남쪽으로 보이는 뾰족하고 단정한 봉우리(풍수에서의 문필봉)는 박인로의 문인적 기질을 잘 보여 주고 있으며, 또한 박인로가 이곳을 집터로 선택한 이유의 하나로 작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그림 4). 

↑↑ ▲집터 추정지 남쪽으로 보이는 문필봉.
ⓒ 동해안시대
‘산맥이 맺힌 아래’는 풍수적 관점에서 두 가지로 해석된다. 첫째는 ‘맺힌’을 ‘끝난’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 때는 산줄기(풍수의 용맥)가 이어져 와 소호천이

감아 도는 안쪽에 머무른 자리에 집터가 자리했다는 뜻이 된다(그림 5). 그러나 ‘맺힌’을 ‘마디를 이룬’으로 해석함이 더 타당할 듯하다. 이럴 경우 ‘맺힌’은 풍수의 ‘과협(過峽)’을 나타낸다. 과협은 통상 우리가 ‘고갯마루’로 부르는 지점이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과협은 봉우리와 봉우리 사이의 잘록하고 좁은 작은 고개로서, 산줄기가 위로 솟구쳤다가 아래로 꺼지는 부분이다(그림 5의 과협).

↑↑ ▲집터추정지로 이어지는 산줄기의 모습.
ⓒ 동해안시대
그런데 과협은 풍수에서 대단히 중요한 것으로 여겨진다. 과협은 땅의 기운(地氣)을 모아주고 응축시켜주는 역할을 하는데, 이것은 마치 호스에서 뿜어져 나오는 물을 더 강하고 멀리 보내기 위해 손가락으로 눌러주는 이치와 같다. 그래서 과협은 풍수에서 좋은 터를 고르는 기준 중의 하나이다. 따라서 박인로는 집터가 풍수적으로 좋음을 표현하고자 한 의도로 해석된다.

‘장풍향양(藏風向陽)’ 또한 풍수적 의미를 담고 있는 표현이다. ‘장풍’이라는 용어는 풍수에서 등장하는 가장 기본적인 용어로서, ‘외부에서 오는 바람으로부터 내부의 생기를 보호한다’의 의미이다. 즉 주위의 산들이 터를 잘 감싸고 있어, 터가 바람에 노출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향양’은 ‘햇빛을 향한다’는 뜻으로 남향의 집터를 나타낸다. 결과적으로 ‘장풍향양’은 집터가 ‘주위 산줄기로부터 잘 둘러싸여 있어 바람으로부터 보호되고 햇빛이 잘 비치는 남향의 터’임을 표현하고 있다. ‘배산임류(背山臨流)’는 ‘뒤로 산을 기대고 앞에는 물을 안고’의 뜻으로 ‘배산임수(背山臨水)’의 의미와 동일하다.

한편 박인로와 교류했었던 영천 출신의 문인인 정호신(鄭好信, 1605~1649)의 『우정칠언율시 삼수(又呈七言律詩 三首)』의 제1수에서도 박인로가 ‘복지(卜地-살 만한 곳을 가려서 정함)’하였음을 축하하며 유거하는 곳의 경치를 서술한 표현이 등장한다. 그 내용은 ‘담이 절벽(또는 깎아지른) 꼭대기를 매달아서(墻懸絶頂)’, ‘처마가 맑은 못에 거꾸로 비치니(軒倒澄潭)’ 인데, 이것은 절벽 위에 집을 지었음을 표현한 의미이다.

집터 추정지는 강가 바위절벽(지리학 용어로 하식애) 위에 자리하고 있다. 과거 하천의 하상이 지금보다 낮았음을 감안하면 바위절벽은 지금보다 높았을 것이다. 실제 이곳 인근 마을이 어릴 적 고향인 필자의 기억으로는, 바위절벽이 지금보다 최소한 수 미터 이상 높았고, 하상은 기반암으로 깔려 있었다.

박인로의 『노계가』에는 집터 건너편의 정자에 대한 설명도 등장한다.

깎아지른 천길 절벽(斷崖千尺)에 날던 용(龍)이 머무는 듯 강두(江頭)에 두른 곳에, 초초정(草草亭, 정자 이름 또는 초라한 정자) 한 두 칸을 구름 띈 긴 솔 아래 바위 기대어 지어내니 천만 가지 모습들이 아마도 기이하네 ~ 유수(流水)는 둥글게 감아 돌면서(盤回) 흘러~

그림 3의 ⓑ지역은 박인로의 ‘초초정’ 설명에 부합된다. 이곳은 소호천이 완전히 감아 도는 곳의 바위절벽 위에 자리하고 있다. 그 위 정자터 추정지에는 현재 작은 시설물이 있는데, 이곳 또한 큰 바위에 기대어 조성되어 있다(그림 6). 

↑↑ ▲높은 절벽 위에서 큰 바위에 기대어 있는 초초정터 추정지.
ⓒ 동해안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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